ECHC 가족들을 소개합니다.
헬렌 은젠가 오피요 (Hellen Njenga Opiyo)
‘동상동몽’(同床同夢)
비록 곁에 있다고는 하나 마음이 서로 갈라져 다른 뜻을 품고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탄자니아의 시골 마을 어린이들에게 보다 나은 의료 혜택을 주고자 모인 저희들은 조금씩의 차이는 있겠지만
큰 뜻에서는 같은 꿈을 꾸고 있겠지요?
저희와 함께 일하는 현지 직원들과 그 꿈을 나누어 보는 시간을 준비하였습니다.
그 첫 주자는 두 아이의 엄마이자 저희 봉사자들의 스와힐리어 선생님이며
ECHC의 코디네이터인 헬렌 은젠가 오피요 (Hellen Njenga Opiyo)입니다.
좀 더 솔직한 이야기를 듣고자 헬렌과 함께 그녀의 집을 찾았습니다.
아이들의 일과 중 가장 큰 한 가지는 ’놀이’ 입니다.
집을 찾았을 때 헬렌의 딸과 아들도 그 역할을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당당히 외출 중이었습니다.
아이들을 부르는 엄마의 소리는 자그만한 핑켓(PINKET NJENGA)과 루니즈(Luniz XERVIOLLAH NJENGA)을
종종걸음으로 집으로 돌아오게 하기에 충분히 우렁찼습니다.
“안녕 핑켓~, 안녕 루이즈~”
인사를 주고받는 일이 아직 아이들에겐 용기가 필요한 듯 보입니다.
부끄러움에 딴 곳만 보는 아이들을 대신해서 헬렌은 아이 같은 목소리로 제게 인사를 해 줍니다.
“아이들이 아직 학교에 갈 나이는 아니죠?”
“그렇죠, 딸아이가 네 살, 그리고 아들이 2살 이니까요.
하지만 이것 저것 준비해야 할 것이 많은 저로서는 아이들이 머지않아 학교에 가게 될 것 같은 느낌이 드네요.
그리고 솔직히 이곳에서 학교를 다니도록 하고 싶지 않아요. 교육 환경도 아이들에게 좋지 않고 교육 수준도 낮거든요.”
헬렌은 탄자니아가 아니라 케냐 출신입니다.
이곳에서 저희와 함께 일하는 가장 큰 이유 중의 하나가 그녀의 영어 능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어린 시절 자신이 자랐던 케냐의 교육 환경과 이곳의 현재를 비교 해 볼 때
아이들에게 더 좋은 교육을 시켜야 한다는 엄마의 생각은 당연한 바람이겠지요.
조금 전 첫 만남에서 헬렌이 딸아이에게 영어로 이름과 나이를 물어보았던 것도
아마 같은 이유에서 출발한 엄마로서의 책임감 같아 보입니다.
“다음 달 쯤 외할머니가 계시는 케냐 뭄바사로 핑켓을 보낼 계획이예요. 케냐에 계신 어머니도 이미 허락해 주셨어요.
월급의 절반을 아이의 생활비를 보내야 한다는 것이 부담스럽기도 하지만 꼭 그렇게 하고 싶어요.”
“핑켓, 외할머니 만나러 케냐에 간다던데 좋아?”
“응!”
하지만 헬렌은 아이에게 케냐에 가는 것을 물어 볼 때 마다 대답이 다르다고 일러 줍니다.
‘할머니 만나러 가면 엄마와 헤어져야 하는데 그건 어때?’라고 묻는다면 대답은 물론 달라지겠죠.
“혼자서 모든걸 꾸려 가는 것 같은데, 남편 이야기를 좀 해도 될까요?”.
“15살 때부터 혼자 일하면서 생계를 유지하고 학교도 다녔어요. 16살 되던 때에 호텔에서 일하게 되었는데
그곳에서 아이들 아빠를 만났지요. 이미 가정이 있는 유부남이었어요.
부인과 이혼하고 자신과 살겠다고 한 말을 순진하게도 믿었지요. 하지만 그건 거짓말이었어요.
17살에 일을 그만두었고 집세를 낼 수 없어 거리로 나가게 되었어요.
임신을 한 상태로 8개월 동안 거리에서 먹고 생활했지요. 어두워지면 건물 안으로 들어가 잠을 자고
새벽 5시가 되면 사람들이 보기 전에 일어나 나오곤 했어요..
그때 한 여성을 만났는데 자신의 집에 와서 세탁, 요리, 청소 같은 집안 살림을 해 달라고 했어요.
다른 방도가 없었던 저는 열심히 일했고, 달이 차서 순탄히 그곳에서 아이를 낳았어요.
아이를 낳고 2달이 지나자 남자가 다시 저을 찾아왔었죠.”
“잠깐만요, 임신한 자신과 아이를 내버려둔 남자를 다시 받아들인 건 아니었겠죠?”
“지금 생각해 보면 참으로 후회스러운 일이지만 그 당시 그를 사랑하고 있다고 생각했어요. 너무 어렸지요.”
그렇게 다시 받아주었지만 아이의 아빠는 달라지지 않았습니다.
집에 늦게 들어오니 돌봐주는 건 고사하고 때리기까지 했습니다.
그녀는 아이와 자기 자신을 먹여 살리기 위해 돈을 벌 수 있는 수단들을 찾느라 무척이나 바빴는데
그 때, 다시 임신을 하게 된 것입니다.
헬렌은 당시를 다시는 떠올리기 싫은, 자신의 삶의 가장 최악의 순간이라고 회고합니다.
심적으로도 매우 혼란스러웠던 그녀는 그곳을 벗어나 탄자니아로 향합니다.
“친구도 없고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 이곳에 와서 외로웠어요. 무척이나 외로웠지요.
그래서 사람들의 머리카락을 따 주는 일을 시작했어요.
머리를 땋아주고 받은 돈으로 저와 제 아이를 위한 음식을 장만할 수 있었지요.
그렇게 시간은 흘렀고 산달이 차서 둘째를 낳았지요.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루이즈를 무사히 순산을 할 수 있었음을 신에게 감사 드렸지요.
그리곤 두 아이를 위해 새로운 일을 찾아야겠다고 다짐했지요.”
그녀는 이런 천신만고의 과정을 겪고 이 곳 탄자니아 퐁궤로 와서 ECHC를 만납니다.
그렇다고 그녀의 고된 시간들이 바로 보상을 받을 수 있었던 것도 아니었습니다.
아이들 아빠는 헬렌이 월급을 받으면 그 돈을 모두 빼앗고 기분이 내킬 때 마다 폭력을 행사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ECHC는 좋은 충고를 통해 제가 가정에서 강인하게 자리 잡을 수 있도록,
저를 강인한 어머니로 설 수 있도록 도와 주었어요.
그 후로 아이들 아빠도 저를 ECHC에서 일하는 독립적인 여성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지요.
우리에게 존경심과 미래 세대들을 도울 수 있는 능력을 얻게 해준 ECHC를
이곳 탄자니아에 설립한 한국 사람들에게 감사한 마음 이예요.
뿐만 아니라 일을 하면서 이곳의 가엾은 아이들을 돕고 있다는 자부심이 커가고 있다는 것을 스스로 느껴서 좋아요.”
힘든 시간을 겪고 이제 겨우 안정된 삶을 살기 시작한 헬렌의 말에서는
분노와 슬픔이 폭풍처럼 지나간 다음 찾아오는 평온함이 베어 있습니다.
어렵게 일구어 온 이 평온함이 계속 이어지기를 마음으로 빌어 봅니다.
“헬렌, 지금 나눈 이야기들을 정리해서
한국의 독자들에게 들려 줄 텐데,
다른 하고 싶은 말은 없나요?”
“저는 밝은 미소의 얼굴들을 만났어요.
외국에서 온 사람들과 일하는 첫 경험이었지요.
우리가 감당하기 어려웠던 부담들을
우리 스스로가 짊어 질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한국 사람들에게 감사해요.
그리고 끝으로 사랑에 대한 제 나름대로의 생각을 말하고 싶어요.
사랑, 이것은 큰 열정과 돌봄, 이해, 믿음,
그리고 시간과 공간을 필요로 하는 어떤 것이라고 생각해요.”
“하하, 마지막 말이라 그런지
가슴에 강력한 무언가를 남기기에 충분하네요.”
“그랬나요? 아, 그리고 저는 가수가 되는 게 꿈이었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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