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A
월 300만원을 조건없이 나눠준다구요?
2016년 6월, 스위스에서는 매월 성인 한 명당 2,500프랑(한화 약 300만원)의 보편적 기본소득을 제공한다는 시민 발의에 대한 국민 투표가 시행되었습니다. 스위스는
보편적 복지국가로 사회 안전망이 잘 확충되어 있으며 물가가 높기에, 월 300만원은 최저 생계비의 수준입니다. 기본소득제의
도입은 기존 복지제도 축소와 다른 공적 사회보장제도의 포기분에 대한 우려, 재원에 대한 우려, 증세 부담, 노동의욕 감소, 이민자 유입 등 무임승차자 증가 등에 대한 우려로 77%의
반대에 부딪히며 부결되고 말았지만, 부결 이유가 기본소득 자체에 대한 반대는 아니었다고
회자됩니다. 또한 기본소득에 대한 국민의 관심과 세계인들의 이목을 이끌었다라는
의의를 남깁니다.
'기본소득제'란,
기본소득제란 국가가 재산이나 소득에 관계없이 모든
사회의 구성원들에게 지급하는 무조건성, 보편성, 개별성을 특징으로 하는 복지 수당 제도를 의미합니다. 이는 1516년 토머스 모어에 의해 가장 먼저 제시되었지만 오랫동안 비주류 개념에 불과했고, 1970년대 들어 세계적으로 부분적인 기본소득제도 실험이 도입되어 현재까지 활발하게 논의 진행 중입니다. 올해 1월 개최된 스위스의 다보스 포럼에서 역시 4차 산업혁명에 따른 '노동의
종말'과 미래 고용불안에 대한 우려로 기본소득에 대한 관심이 증가되고 있는 추세임을 살필 수
있습니다.
기본소득제를
도입한 국가와 사례
핀란드는 올해로 국민국가 단위로 기본소득
실험을 실시하게 된 최초의 국가가 되었습니다. 핀란드는 2개년
정책 실험(2017-2018)을 통해 2016년 11월 기준 사회보장국(Kela)에서 기본 실업수당 또는 노동시장 보조금을 받고 있는 만 25~58세
사이의 실업자 중 2000명을 무작위로 선발해 2년
동안 매달 560유로(우리 돈으로 약 68만원)을 무조건 지급합니다. 이 실험은 기존의 사회보장 시스템을 노동
형태의 변화에 더 잘 조응하도록 개선하는 것, 실업수당에 의존하도록 하는 유인 요소들을 줄임으로써
실업자들의 노동시장 참여를 활성화하는 것, 관료주의를 줄이고 지나치게 복잡한 사회보장 수당
체계를 단순화하는 것 등이 핵심 목표로 제시됩니다. [1]
기본소득제는 지속적 개혁과 조정을 거치며 보편적인 복지 국가를 추구해온 북유럽만의 이야기는 아닙니다.
'기본소득과 현금지급이라는 혁명적 실험'을 부제로 하는 <분배정치의
시대>의 저자 제임스 퍼거슨 교수는 일부 개발도상국에서도 부분 도입 중인 기본소득제에 대해 남아프리카의
사례를 연구합니다. 남아프리카의 여러 국가는 노령연금, 아동지원보조금, 장애보조금 등 대부분의 인구에 실질적 혜택을 부여하는 광범위한 사회적 지급 프로그램을 실행해가고 있습니다. '사회적 보호'라 명명되는 이 프로그램들은 오늘날 국제적인 반빈곤
정책에서 새로운 '빅 아이디어'로 회자되는 현금지급, 즉 '가난한' 수혜자
집단에게 약간의 현금을 직접 지급하는 형태를 취합니다. 현금지급 기본소득 캠페인을 시행한 결과 남아프리카 공화국에서는 2012년 전체 가구의 44%가 노령연금, 아동보호지원금 등 한 가지 이상
보조금 혜택을 받으며, 기아 가구는 2002년 29.3%에서 2012년 12.6%로 줄어드는 효과를 보였습니다. [2]
동아프리카의 케냐에서는 주민들에게 현금을 직접 지급하고 이 현금을 쓰고 싶은 곳에 쓰도록 하는 실험이 진행 중입니다. 이베이(eBay)의 공동창업자 피에르 오미디아르가 운영하는 자선단체 '기브 디렉틀리(GiveDirectly)'는 케냐 서부 키수무에서 지난 5년간 주민들에게 일정액의 현금을 지급하고 생활개선 실험을 진행합니다. 현금을 지급받은 주민들은 자신들이 꼭 필요한 곳에 소비를 하며 자녀들의 학교 출석률 증가와 의료기관 방문, 가계 저축 등이 증가되는 효과를 보이고 있습니다. 이렇듯 굶주린 사람들에게 곡식을 나누어 주고 집을 잃은 난민에게 천막을 지어주던 구호활동이 이제 점점 신용카드나 모바일 머니 형태로 현금 직접 지급 방식으로 이루어지면서 보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원조 성과를 보이고 있는 것이죠. [3]
예상보다
이른 대선으로 한국에서 역시 기본소득이 주요 공약으로 제시되고 있는 추세입니다. 이전부터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있어왔지만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가 점화된 것은 이재명 성남시장의 공약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기본소득은 단지 '공정한 분배'만을 위한 정책이 아니라 우리에게 가처분 소득을
늘려 소비를 권장하는 '경제 활성화' 정책이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그는 현재 성남시의
만 19~25세의 청년들에게 '청년 배당'이란 이름으로 월 50만원을 제공하고 있습니다.
반대하는 이유
하지만 이쯤에서 우리는 기본소득의 개념을 보다 명확히 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복지국가소사이어티의 공동대표 이상이 교수는 기본소득제의 개념이 '첫째, 자산조사 없이 다른 소득이 있더라도 개인 단위로 매달 현금을 균등하게 지급한다. 둘째, 노동 여부와 의사를 묻지 않고 무조건적으로 지급하되 생계 보장과 사회 참여가 가능할 정도로 충분한 소득을 지급한다.'에서 벗어나서는 안된다며 많은 국가들이 기본소득의 본질을 흐리고 보편주의 복지국가 건설을 대체하려 한다고 지적합니다. [4]
한편 스위스가 우려했던 것과 마찬가지로 기본소득제를 위한 재원을 마련하는 것 역시 반대의견의 하나에 속합니다.
미국을 사례로 들어볼까요. 미국이 연간 10,000달러의 기본소득을 전 국민에게 지급하고자 할 때에는 조세부담률을 현재의 GDP 대비 26%에서 독일 수준인 35%까지 올리고, 의료보장을 제외한 모든 사회보장프로그램(연금 포함)을 폐지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수준의 조세 개혁은 효율적인 징수 방법을 활용한다 하더라도 경제성장과 부의 창출에 예측하기 어려운 영향을 미칠 수 있습니다. 이에 반해 연간 10,000달러는 여전히 매우 낮은 소득입니다. [5]
기존의 노동과 소득 연계 해체시의 혼란을 우려하는 시선도 있습니다. 본래 소득은 노동에서 비롯되는 부분이 크지만, 기본소득의 제공으로 노동의욕이 저하한다는 것입니다. 물론 인공지능, 로봇기술 등으로 대체되는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해 노동시장은 변해가고 있지만, 이들은 인간과 로봇의 일자리 대체가 순식간에 일어나는 것은 아니며, 인간이 또 다른 일자리를 찾아나설 수 있고, 청년들을 고용할만한 충분한 수요가 여전히 있다고 생각하기에 기본소득제는 너무 앞서나간 정책처럼 비추어집니다. 소득에 상관없이 동일한 현금을 지급하기에 오히려 불공평한 것이 아니냐는 주장도 따릅니다.
기본소득한국네트워크 (다니엘 라벤토스 교수)
옹호의 입장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현재
기본소득에 대한 논의를 활발하게 전개해 나가고 있습니다. 기본소득스페인네트워크의 대표이자 바르셀로나대학의 경제학 교수 다니엘 라벤토스는 지난해 쓴 ‘기본소득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에서 기본소득의 장점 중 하나로 임금을 위해 일하지 않아도 된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임금을 지불하지는 않지만, 개인에게 가치 있는 활동을 하더라도 경제적 어려움을 겪지 않을 수 있다는 ‘선택의 자유’가
보장된다는 것입니다. 자원봉사처럼 임금 체계에서 저평가된 노동이나, 학업이나 육아 등 아예 노동으로 취급되지 않는
활동을 하면서도 살 수 있는 자유를 제공하는 것이 기본소득의 가장 큰 장점입니다.
기본소득을
통해 노동관계에서 자본가의 힘을 약화시킬 수 있다는 가능성도 제시합니다. 다니엘 라벤토스의 표현에 따르면 “노동자들이
파업을 할 때 기본소득은 무조건적이고 고갈되지 않는, 저항의 지원금이
될 것”이며 “지금처럼 파업 기간 동안 다른 수입원이 없어서 삶이 매우 힘들어지는 절대다수 노동자들의 현실과는 다르게 매우 안정적인 파업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또한 다니엘 라벤토스는 노동자들이 임금으로부터
자유로워지기 때문에 회사의 부당한 노동환경을 굳이 감내하고 받아들일 이유가 없어진다고 설명을 덧붙입니다. [6] 그렇다면 기본소득은 많은 시민들이 정치적 문제에 보다 집중적으로 대처하고 적극적으로 생활의 민주주의에 참여할 수 있는 보다 많은 시간과 경제적 가능성을 가지게 할지도 모릅니다. [7]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주라'?
언제부턴가 개발협력
분야의 슬로건처럼 내려오던 '물고기를 주는 대신, 물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주라'의 시대는 이제 끝난 것일까요? 기본소득제에 대한 긍정론과 비판론이 대립하고, 기본소득제를 교묘하게 속여 보편적 복지를 대체하는 수단으로 만들어서는
안될 것이라는 일각의 비판도 존재하지만 퍼거슨 교수의 말처럼 기본소득과 관련된 논의는 다양한 경험과 실험에 앞서 이론적으로, 이데올로기적으로 확신있는 대답을 낼 수 있는 것은 아닌 듯 합니다. 4차 산업혁명으로 인한 변화가 그리
빠르게 다가오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현실적으로 제시되는 가운데, 노동시장의 양극화 해소, 정책을
통한 일자리 창출, 최저생계비 보장 등 국민 전반의 복지를 위한 고민이 거듭되는 시점입니다.
"우리 모두가 기본소득을 받는다는 건, 모두가 세월호 배지를 달고 있는 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유가족들이 길을 지나다가 세월호 배지를 보면 ‘우리의 아픔에 공감하고 있구나’ 생각되어 고맙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우리가 지금 어마어마한 절벽을 맞닥뜨리고 있다는 절망감, 물질의 빈곤, 관계의 빈곤, 소통의 빈곤이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는 자본주의 사회에서 기본소득을 같이 받는다는 건 ‘우리가 한배를 타고 있다’는 선언과 같다. ‘나의 빈곤’과 ‘너의 빈곤’을 연결해주고 서로의 아픔을 알아봐주려는 선언."
마지막으로 <분배정치의 시대>를 번역한 조문영 교수의
발언을 언급하며 글을 마칩니다. 그녀의
말처럼 우리에게 지금 필요한 것은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의 갈등과 아픔을 치유하기 위해 기본소득제로 대표해 제시되고 있는 따스한 연대의식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참고자료
[1] "핀란드는 왜 기본소득 실험을 시작했나?", 다른백년
: http://thetomorrow.kr/archives/3710
[2] 「분배정치의 시대」, 제임스 퍼거슨
[3] "가난한 케냐 주민에게 조건 없이 현금 지원 땐 어떤 일 일어날까", 연합뉴스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3/02/0200000000AKR20170302004800009.HTML
[4] "지금 기본소득 제도를 반대하는 이유", 복지국가소사이어티
: http://www.welfarestate21.net/home/data3.php?mode=read&mod_gno=2393
[5] 『스위스
기본소득 국민투표』, 한국보건사회연구원, June 2016, Vol.24
: https://www.kihasa.re.kr/web/publication/brief/view.do?menuId=53&tid=38&bid=991&aid=24&ano=1&pageIndex=3
[6] "행복하고 위험한 정책? 기본소득을 말하다", 미디어오늘
: http://www.mediatoday.co.kr/?mod=news&act=articleView&idxno=135487#csidx9bf7c99d5b02ca6b326325ea2ab4b09
[7] 기본소득, 위키백과
: https://ko.wikipedia.org/wiki/%EA%B8%B0%EB%B3%B8%EC%86%8C%EB%93%9D
- "가열되는 기본소득 논쟁··· '유토피아'는 불가능한 꿈인가", 경향비즈
: http://biz.khan.co.kr/khan_art_view.html?code=920100&artid=201701271330001
- "기본소득은 필요한가?", 경남신문
: http://www.knnews.co.kr/news/articleView.php?idxno=1207484
- "일 안해도 매달 '000'원, 기본소득제 가능할까요", 연합뉴스
: http://www.yonhapnews.co.kr/bulletin/2017/03/03/0200000000AKR20170303172100797.HTML?input=1195m
- "2017년 다보스 포럼 주요 내용과 시사점", 인타임즈
: http://intimes.kr/news/newsview.php?ncode=1065576829989079
- "핀란드 기본소득 실험 2개월, 어떤 변화?", 한겨레
: http://www.hani.co.kr/arti/international/europe/784752.html?dable=30.1.6
- "가난한
자는 '현금'에 집착한다!", 프레시안
: http://www.pressian.com/news/article.html?no=127371
- "물고기 잡는 법? 물고기 주는 법!", 한겨레21
: http://h21.hani.co.kr/arti/PRINT/43030.html
- "'핀란드 정부, 모든 국민에게 기본소득 지급!'의 실체", 허핑턴포스트코리아
: http://www.huffingtonpost.kr/2015/12/07/story_n_8736722.html